강재구의 무장해제_박찬경 작가

1. 휴전 사회

군인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기 사진을 올리는 것도 흔한 일이고, 군 기관이 소셜 미디어를 직접 운영하는 것을 보면 군인은 예전에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시적이다. 그러나 병사의 '활기찬' 일상, 애국 서사, 군사적 능력 등은 노출되지만 그 외의 것들은 배제되기 마련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양상을 보아도 치밀하게 제어되는 이미지 노출은 전쟁의 중요한 일부이다. 전쟁 수행과 그 재현은 분리 불가능해졌다. 드론 조종사의 화면, 미사일의 열화상 영상, 위성 이미지가 전쟁의 '현실'로 유통된다. 결국 군과 병사는 의도적으로 노출되지만, 전장의 현장은 그 어느 때보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 있다. 폭력은 있으나 그 폭력이 닿는 육체는 사라지므로 폭력 자체가 추상화된다. 전쟁터가 개인 미디어, 전략적 노출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이는 새로운 가시성은 동시에 ‘실제 몸이 거기 있다는 느낌’이 사라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취약한 개별 인간으로서 병사의 신체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변화는 한반도처럼 휴전 중인 곳에서 특이하게 굴절되어 나타날 뿐, 점점 더 일반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다들 알다시피 남북한은 아직 법적으로 휴전 중이다. 그렇게 알고는 있지만 여전히 한반도가 전쟁 중이고 잠시 쉬는 중이라고 체감하는 한국 사람이 얼마나 될까?한국전쟁은 세계에서 최장기간 정전 중인 전쟁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와 있다고 하니 전쟁에 대한 실감이 희박해질 만하다. 더구나 최근 들어서는 남북 사이에 대규모 무력 충돌도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전쟁은 둘째치고 냉전의 느낌조차 멀어지고 있다. 군인의 재현과 관련해 한국 사진의 경향도 이러한 변화를 일정하게 반영하는 것 같다. 전쟁과 냉전의 긴장, 국가와 집단의 규율을 재현하는 것에서 군인 개인과 일상, 또는 문화가 최근에는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으로 보인다.1) 강재구의 사진은 이 두 가지 방향을 모두 향해 있다. 그는 분단국가의 긴장과 함께군인의 초상을 통해 이 '오래된 휴전'의 시간대 또한 담담하게 관찰한다.

오래된 휴전의 시간대에서 군대는 ‘군대’라는 강력한 집단성과 병사의 개인성 사이에, ‘군인성’과 청년 남성 사이에 균열이 일상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군제도에서 이 균열은 군복무의 의무와 개인의 자유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특히 <예비역> 연작에서 풀어헤친 군복, 장발, 슬리퍼와 에코백 등은 ‘휴전 사회’에서 형식화된 의무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시차를 두고 찍은 인물의 변화에서도 긴장과 이완, 군인과 ‘덜 군인’의 차이를 직관할 수 있다. <예비역>에서는 긴장이 한껏 풀어져 옷만 군복인 ‘민간인’을 보지만 작가가 처음 군인 연작을 시작했던 <이등병>에서는 군기가 바짝 든, 피곤한 병영 생활을 상상하게 하는 병사들이 있다. (이 책의 20쪽 [a private#02]가 대표적이겠다) 전쟁의 압박과 긴장이 서울 남쪽의 일상에서 찾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어떤 신체들에는 여전히 이 긴장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군인 중에서도 최하위 계급인 이등병이야말로 그 긴장과 압박이 집중된 몸이다. 어떻게 보면 훈련병이나 이등병의 긴장감은 계통발생을 반복하는 개체발생이라고 할만하다. 마치 1950년과 2026년의 76년이 군대 생활 18개월 동안 압축되어 반복된다고 보면 어떨까? 이등병이 전쟁의 초입이라면, 예비군의 흐트러진 모습은 요즘의 남북한 상황 - 좋게 말해 평화, 안 좋게 말해 전쟁 망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다.

장기 휴전의 공간에서 강재구의 사진은 사병 개인에게 귀속된 변화의 시간만이 아니라 군인과 사회의 특수한 관계에도 주목한다. 특히 [12mm]의 경우, 국가와 청년 남성 사이에 놓인 복잡한 관계가 군인 당사자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공유된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한국의 징병제 군대문화의 가장 독특한 점은 병역이 사회적 통과의례로 일종의 성인식처럼 ‘의례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남성 인구 대다수가 군에 복무하기 때문에 입대, 면회, 휴가, 전역 등은 병사 개인에서 가족, 연인, 친구의 경험과 공유된다. 그렇게 보면 한국에서 군 생활은 은폐된 특수 경험이 아니라, 사회적 대화의 일부이다. 만약 모병제에서 군인이 인구의 소수이고, 민간과 군의 경험이 분리되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한국에서 군 경험은 사회 전체에 분산된 신체적 기억이라 할만하다.

<12mm> 연작은 그래서 일종의 가족사진, 기념사진의 형식을 띠게 된다. 마치 결혼사진이 곧 분리될 가족 성원의 이미지 족보인 것처럼, 입영 직전의 기념사진 역시 곧 분리될 청년의 사회적 결합을 기록한다. 그렇다면 입영 직전의 이 사진들은 군대로 가는 자와의 기억 공유, 관계의 약속이므로 곧 부재할 인물을 매개로 오히려 사회적 연대가 강화되는 장치이다. 이렇게 장기 휴전 중의 한국 사회는 군대라는 고리를 통해 서로 분리되는 것만이 아니라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 이 책 162쪽의 [12mm#7-1]이다. 곧 군대로 떠나갈 청년을 뒤로 친구들이 어린 시절 했을 법한 말타기 놀이를 한다. 저 멀리 지나가는 현역 군인들이 개구쟁이 친구들과 곧 입대할 인물 사이를 가르고 있어, 상황은 더 부조리해진다. 이 사진만이 아니라 많은 [12mm] 연작들에서 이러한 기묘한 활력을 발견할 수 있다. ‘같이 있음’의 활력이랄까, 군대로 친구나 연인을 떠나보내는 낯선 상황이 플래시 광선 앞에 그대로 드러나는가 하면, 같은 플래시라이트는 그 상황이 가져오는 갑작스러운 결속을 축하하는 작은 폭죽 같은 역할도 할 것이다. [12mm]에서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징병제를 매개로 한국 사회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사회적 접착제로서의 사진이다.

2. 무장해제

사진가의 말에 따르면 [12mm], [입영 전야] 등의 연작에서 병사들의 긴장이 드러난다고 한다. "입영 전날, 긴 머리를 깎고 스튜디오에서 조명을 받으며 벗은 몸으로 카메라를 마주한 청년의 모습에서 지나왔던 시간과 속해있는 환경,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한순간에 표출되고 사진의 표면으로 드러난다."2)

고강도 훈련, 집단생활, 위계질서에 대한 공포, 자유를 빼앗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가족 연인 친구와 떨어지는데 따르는 불안이 이들 사진에 드러나며, 그런 감정을 포착하려고 했다고 사진가는 말한다. 사진에서 그런 심리가 ‘표현’되는지, 그렇게 읽히는지는 관객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불안을 보아야 할 이유이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해보자. 만약 군대에 가야 할 이유를 충분히 납득했고, 이념적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심지어 군대에 가고 싶다면 불안과 공포는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잘 표현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두려움이라는 심리적 사건의 다른 면은 징병제에 대한 비자발적인 동의일 것이다. 우리가 만약 이 사진들에서 어떤 불안을 본다면, 그것은 동시에 의무적 징병제가 안쪽에서 흔들리는, 한없이 연기되는 전쟁(동시에 평화)의 시간 안쪽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심리와 그 표현에 관한 이야기는 작가가 왜 ‘초상’이라는 형식을 완고하게 유지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실 전통적인 의미의 ‘초상’- 인물의 내면이 외부로 드러난다는 믿음은 이미 붕괴했거나 최소한 자명하지 않다. 단일하고 안정적인 주체 또는 정체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철학적인 판단 때문만은 아니다. 내면이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믿기에는 외면이 내면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현실을 훨씬 많이 겪고 있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에 범람하는 셀피나 초상 사진이야말로 이를 증명한다) 강재구의 사진에서 ‘초상’이 여전히 의미 있다면, 그것은 심리 표현이기보다 그 모호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단순히 공포, 불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체념, 수용, 무지, 감내, 결심 등이 뒤섞인 결국 뭐라고 한마디로 지칭하기 힘든 감정 복합체가 있을 것이다. 사진에 등장하는 청년 남성의 모습에서 어떤 구체적인 심리적 실체로서 공포나 불안을 본다기보다는, 그렇게 보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모호성을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모호성이 중요하다. 그 모호성, 비결정성, 흔들림이야말로 결정적인 국가 기관인 군대의 기계성, 강제성, 집단성 등을 근저에서 침식시키기 때문이다. 강재구의 사진들이 배경과 맥락을 최대한 배제하되(심지어 사진 제목에 인물의 이름이나 나이 등도 적시하지 않는다), 인물의 디테일에 모든 시선을 집중하게 하는 ‘초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인물의 표정과 살과 핏줄 속에서 국가-기계가 도대체 어디서 작동하는 것인지, 군인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이런 강재구 초상 사진의 수사법이 최대한 그 능력을 입증하는 작업은 <입영 전야>이다. 배경을 깨끗이 지우고 좌대 위에 인물이 포즈를 취한다. 알몸의 남성들은 미술사에서 보던 누드 그림의 포즈, 형식주의 사진에서 흔히 보는 여성의 포즈에 가까운 자세로 (<입영 전야 12>처럼 그조차 명확하지는 않지만) 있다. 앞서 말한 모호성에 성적 모호성 - 젠더가 불확실하다는 뜻이 아니라 사진의 방법으로 꾸며낸 성적 코드가 거의 없다는 면에서 남성 군인에 대한 이런저런 선입견이 작동할 여지가 별로 없다. <입영 전야>에 한 가지 중요한 설정이 있다면 인물이 앉는 좌대이다. 좌대는 인물을 조각처럼 보이게 하지만, 인물이 실제 조각이 아닌 만큼 자세를 취하기에 너무 비좁고 불편해 보인다. 좌대가 누드 미술사의 코드를 강화하는 만큼, 아이러니하게도 불편한 알몸의 기념비성은 오히려 축소된다. 이 사진들에서 알몸은 숨길 것 없는 당당한 신체가 아니라 전통적인 볼거리 미학으로 보자면 ‘그다지 볼 것이 없는 그러나 본 적이 없는’ 신체이다. 이렇게 오히려 희귀해진 평범성으로의 하강을 통해 우리는 그 개인들을 이루는 살과 피부, 실존의 직접성, 유약한 개인, 또는 모든 개인에게 무조건 주어졌을 유약함을 보게 된다. 그렇게 보면 ‘군인’이라는 그룹핑이나 분류를 도입한 사진이라 할지라도, 개개인의 초상 사진은 그러한 분류체계의 도구적인 시선을 거부하는 힘을 내장한다.

그 개개인의 살과 피부와 체모가 이미 분류 불가능함의 현장이다. 그렇다면 군대가 지워지고, 다음으로 무기와 군복이, 마지막으로 일상복마저 벗겨지는 무장해제의 끝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포장을 걷어낸 진실, 화장이나 가면을 벗은 민낯을 의미하는 것일까? 기대와 달리, <입영 전야>에 등장하는 알몸은 오히려 우리를 정체성에 대한 최초의 질문 앞으로 되돌려 놓는다. 우리가 집단에 대비해서 개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사진에 드러나는바, 더 이상 드러날 것이 없는 상태이다. 더 이상 드러날 것이 없을 때 정체성 질문의 지반 자체가 허물어진다. 우리는 이 사람이 청년이다, 남자다, 애국자다, 졸병이다 라는 범주화 이전의 상태인 - ‘이 사람은 이 사람이구나’라고 동어 반복하는 순간에 처한다. 이 역설에 주목해야 한다. 옷이라는 베일을 벗겨 알몸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민낯이야말로 베일이며, 알몸은 군복과 무기보다 더 강력한, 따라서 해제할 수 없는 옷 – 우리가 ‘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군인의 알몸이야말로 궁극적인 카모플라쥬이다.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군복의 카모플라쥬가 도시에서 군인을 더욱 눈에 띄게 하는 것과 다르게 말이다.

3. 만날 수 있는 신체

강재구의 군인 사진에서 제거되는 것은 훈련장, 내무반, 무기, 군복만이 아니다. 돌격, 행진, 타격과 같은 역동성도 제거된다. 강재구가 선택한 ‘초상’이라는 어찌 보면 낡은 미학이 근래의 군인과 전쟁 재현에서 비평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병사와 무기의 과잉 역동성과 ‘순식간’의 폭발과 섬광을 조용한 지속의 시간으로 방어하기 때문이다. 군인의 초상과 조용히 대면하는 시간은 좌표를 찍는 순간이나, 시각적 패턴의 알고리즘 속에 점을 폭격하는 시간과 대비된다. 인공위성의 감시망과 인공지능의 연산 속도가 현대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전쟁이나 병영의 삶을 다루는 드라마나 영화의 시간 역시 프레임 안팎을 드나드는 피땀 범벅의 클로즈업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런 재현들은 망막 표면에 짧고 강렬하게 작용한다. 그렇게 보면 강재구의 삼각대 위에 가만히 올려진 카메라 앞에 장시간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병사들의 몸은, 관객에게 보인다기 보다 관객과 만난다.

만약 어떤 신체 앞에서 – 더구나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때로 벌거벗은 몸 앞에서 – 본다는 행위는 원격 조망이나 화면 위의 타켓 설정과 달리 보는 사람의 육체적 경험을 불러 일으키는 일종의 직접적 대면과 가깝다. 물론 이러한 만남이 사진을 보는 시각적인 경험과 별개의 것은 아니지만, 시선은 어디선가 멈추고 어디선가 흐르고, 어디선가 가까이 가고 어디선가 물러선다. 마치 낯선 사람과 처음 만날 때처럼 세부와 전체, 표정과 의미, 욕망과 수치심 사이를 오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러한 경험은 사진의 표면을 훑는 우리 시선이 지각-심리적으로 줌인 줌아웃할 때 중간중간 초점을 잃는 경험이다. 초점을 어디선가 잃어야만 존재가 떠오를 것이고, 그러한 심리적 저해상도 속에서 오히려 우리가 타고 있는 미디어-로켓에서 잠시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등병>과 <입영 전야>에서 작가는 몇 달, 때로 몇 년의 시간차를 두고 한 인물을 촬영했다. 시차를 두고 찍은 같은 인물의 변화를 우리는 그 결과만으로 비교해 보지만, 변화는 결국 그사이의 시간에 일어났다. 그 시간은 보이지 않는 변화, 아웃포커스 된 공간이다. <사병 증명>처럼 아예 사진이 도려내져 누가 있었던 것인지 알 수조차 없는 무해상도의 공간도 있다. 휴전 사회의 시간, 특히 그 사진의 시간은 어떨까? 나날이 혁신되는 위성영상 기술과 무기체계의 결합에서 카메라와 메모리칩은 핵심적인 기능을 한다. 군에서 사진병을 했던 작가의 카메라와 메모리 카드는 전혀 다른 기능을 한다. 강재구의 고해상도 사진은 신체를 원격화하고 추상화하는 시각 기계의 방향을 정 반대편으로 돌려세운다. 강재구의 카메라가 찍은 인물 사진의 디테일은 좌표처럼 존재를 좁히는 경향에 맞서, 그들과 만날 수 있도록 존재를 넓히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초상’의 전통을 다시 탈환하려는 이유이다.


1)* 예를 들어 오형근의 <중간인> 연작(2012)에 등장하는 군인들은 현실의 군인이지만, 동시에 모델 같은 느낌을 준다. 달리 말해 군인의 문화적 코드들 – 복장, 자세, 장소 등이 정교하게 조직된 이미지다. 군인은 군인이지만 군인의 배역을 맡은 ‘문화적’ 존재로도 보인다. 이 사진들을 이한구의 <군용>(1989)과 비교만 해봐도 이러한 변화 - 전쟁과 냉전의 긴장, 국가와 집단의 규율을 재현하는 것에서 군인 개인과 일상, 또는 문화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으로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2) 작가의 석사 논문, ‘남성 누드 포트레이트에 관한 연구 – 작품 <입영 전야>를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 2022, 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