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된 획일화의 상실풍경 - 강재구의 이등병과 예비역
본지는 매달 전시기획자나 평론가가 추천하는 젊은 작가를 소개하고 있다. 한국사진계에서 중요한 작가로 떠오를 가능성이 엿보이는 젊은 작가 시리즈, 그 열번째 작가는 스타일큐브 잔다리 디렉터인 김민성씨가 추천한 강재구이다. <편집자 주>
글·김민성 (스타일큐브 잔다리 디렉터 | mskim@zandari.com)
작품제작 초기의 1차 자료들
군대. 집단적 획일성과 배타적인 조직체계로 파시즘의 잔향이 여전한 곳. 그 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그들은 군인이라 불린다. 전 세계적으로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묘한 관심 속에서 한국의 군인들은 여전히 존재의 당위성을 지켜내고 있다. 강재구의 이등병과 예비역 시리즈에 등장하는 모델들은 바로 이러한 군인이거나 군인이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부보다는 전체가 우선되고 철저하게 힘의 완력으로 형성되는 이 특별한 집단 속에서 그 집단의 존재감을 위해 획일성(uniformity)을 배운다. 머리모양에서부터 속옷 한 장까지 타인의 취향은 절대 불가다. 이는 다양성이 찬미되고 개인주의적 미학 등을 인정하는 자주적인 영역에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획일성은 군대에서의 존재감을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명분이자 수단이다. 일반적으로 군대 초년인 이등병들은 획일성을 통해 자기중심적인 세상을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강재구는 이등병의 운명을 아주 강한 어조로 바꾸어버린다. 상실된 존재의 중심을 대표하는 이등병으로 하여금 군복을 벗도록 하여 획일성의 일차적 해체를 시도한다. 서로 다른 사회적 관계를 지니고 있는 대상들이 한순간에 시각적으로 획일화 시키는 힘을 지닌 군복. 이 유니폼이 주는 강제성은 물론 집단적인 힘을 해제시켜버림으로써 이등병이라는 계급적 호칭보다는 인간의 모습에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작가의 말처럼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이등병에게 미약하나마 생명을 주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서의 이등병은 비복무자에게는 여전히 시뮬라크럼과도 같은 곳인 군대에서의 유일한 생명체일지도 모를 일이다. 강재구의 이등병이 획일성의 해체를 통한 중심의 회복이라면, 반면에 그의 예비역은 여전히 군대의 잔향을 끌어안고 사는 반사상태의 주체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모조 공간인 군대에서의 상실된 중심이 사회에 복귀하여 한동안 겪게 되는 반사상태. 다시 말해서 사회적 부적응의 상태 속에서 예비역들은 획일성의 그리움을 끌어안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의 군대이야기는 예비역들에게 있어 추억 그 이상의 것이 되어 버린다. 아이러니다.
이등병, 젤라틴 실버 프린트. 2003년
이와 같이 강재구의 이등병과 예비역 시리즈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대인들의 모순적인 양면성에 대한 성찰이다. 게다가 이러한 대상의 인물들은 사진의 본질인 진정성의 효과를 보는 까닭에, 작가의 성찰에 보다 힘을 실어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에는 작가가 부지불식간에 전개해 놓은 군대의 부비트랩이 있다. 진정성으로 대표되었던 사진의 본질에 대한 기묘한 도전이 그것이다. 어느 순간 관람객들의 열광 한가운데 놓여있는 사진이라고 하는 매체의 양면성에 대해 작가의 이등병과 예비역은 또 다른 기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심의 상실과 회복 그리고 이를 회상하는 아이러니가 동시에 존재하는 현 사회에서 이등병과 예비역은 광의적 표현으로 우리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으며, 협의로서는 사진 그 자체의 자화상을 의미한다. 사진 속의 대상인물을 통해 사진의 정체성을 모색한다는 것이 어쩌면 모순일지도 모르나, 한편으로는 이보다 더 사진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강재구의 인물들이 말하고 있는 오늘날 사진의 모습이란 무엇인가.
예비역, 컬러 프린트, 2004년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사진은 모더니즘의 탯줄을 끊고 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환경을 거치며 무수한 담론들 속에서 양자적 태도를 갖는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현대미술은 대표적인 두 가지 모습으로 진행되어 왔다. 모더니즘적인 것과 모더니즘적이 아닌 것. 이 양간의 대립은 미술계의 다양한 매체들을 등장 시킨다. 추상의 주류에 환호하는 관람객은 언젠가부터 작품의 향유자이면서 동시에 주체자가 되는 경험을 통해 새로운 미술의 형식에 길들여지기 시작한다. 한편, 작가는 자기중심적인 탐구적 태도보다는 스스로를 사회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 그 의미의 짜임을 탐색하게 된다. 다분히 추상적이며 심미주의에 천착해 온 모더니즘 입장에서 보면 현재의 미술이 만행하고 있는 반복과 복제 그리고 공간을 점유해 버리는 행위들은 천년의 역사가 지켜온 예술의 도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진, 영상 그리고 설치처럼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확장하며 변화하는 장르들은 무리지어 현대미술의 정상에 깃발을 꽂았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사진이 있다. 무엇보다도 유일성에 대한 오래된 미술의 가치가 사진으로부터 일격을 당한 것이다. 이로써 미술에서의 중심의 상실은 다시 발생한다. 소위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사라졌다고는 하나 실은 존재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여전히 존재 하고 있는 강재구의 이등병과 예비역처럼 말이다. 그리고 실제를 말할 것 같은 사진의 허구적 구성력처럼 말이다.
강재구의 시선이 다소 어중간해 보이지만 상당히 치밀하다. 이등병의 죽음을 초래했던 군대의 획일성을 유니폼(군복)의 제거로써 성공한 듯하나, 이등병의 목에는 여전히 군대의 기표인 군번표가 걸려있다. 군번표와 함께 절대적으로 제거할 수 없는 이등병의 머리카락은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도 그들이 군인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린다. 예비역들의 부조화적인 의복 역시 군대의 획일성에 대한 부지불식의 공감대를 대중에게 전달한다. 강재구는 이러한 과정들과 이미지들을 통해 현대사회의 혹은 예술계의 없어지지 않을 획일화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해체되었다 하더라도 거세되지 않으면서 간신히 현대 사회를 존속시키고 있는 획일화가 현대사회의 회색빛 딜레마라는 것을 조심스럽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현대사회의 교육과 정치 그리고 미술내부가 획일화를 벗어나겠다고 발버둥 쳐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그 무엇. 획일성이 해체된 듯 하나 여전히 꿈틀되는 중심의 상실은 오늘날 우리의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강재구의 이등병과 예비역은 해체된 획일화의 상실풍경인 것이다.